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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으로 소통할 줄 알았던 오프라 윈프리는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최선의 삶을 살도록 격려하고 용기를 주었던 인물이다. 오프라 윈프리처럼 긍정적인 태도로 열심히 노력하면 우리도 마음먹은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오프라 윈프리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한다.
오프라 윈프리는 어떤 사람일까?
오프라 윈프리는 유명한 텔레비전 토크쇼에 진행자다. 오프라 윈프리쇼는 지금까지의 모든 토크쇼 가운데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다시 말해 전 세계 어디에서도 오프라 윈프리 쇼보다 많은 사람이 본 토크쇼는 없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오프라 윈프리를 토크쇼에 여왕이라고 부른다. 오프라 윈프리가 어린 시절 수돗물조차 나오지 않는 농장에서 가난하게 자란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그녀가 사랑을 받은 진짜 이유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최선의 삶을 살도록 동기를 불어넣어 주었기 때문이다.
오프라 윈프리는 어떻게 토크쇼에 여왕이 되었을까?
그녀는 텔레비젼쇼의 대성공으로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토크쇼를 통해 매일 수백만 명 앞에 설 기회를 가졌고 그 기회를 살려 전 세계에 좋은 영향을 끼쳤다. 그녀는 자신의 쇼의 온 사람들이 스스로 특별하고 존중받은 존재라고 느낄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래서 오프라 윈프리 쇼에 온 사람들은 그동안 어디에서도 말하지 못했던 자기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곤 했다. 쇼를 보는 시청자들 역시 오프라 윈프리를 날마다 집에 놀러 오는 친구처럼 느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가운데 한 명이라고 생각한다. 2013년에는 그녀는 대통령 훈장까지 받기도 했다.
오프라 윈프리 놀라운 사실
그녀의 원래 이름은 오르파였다. 성서에 나오는 인물 이름에서 따왔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 오르파를 오프라로 발음해서 아예 이름을 변경했다. 만으로 겨우 3살때 글 읽는 법을 배웠으며 토크쇼에서 방청객 모두에게 새 자동차를 선물한 적도 있다. 그녀는 디즈니 영화 공주와 개구리에서 티아나 공주에 엄마의 목소리를 연기하기도 했다. 또 그녀는 하포라는 회사를 세웠다. 그녀는 아프리카계 미국 여성으로 써는 최초로 억만장자가 되었다. 어린이들의 교육을 위해 4억 달러가 넘는 돈을 기부했고 남아프리카 여학생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윈프리는 캘리포니아주의 약속의 땅이라고 이름 지은 아름다운 저택도 갖고 있다.
오프라 윈프리의 어린시절
그녀는 1954년 1월29일 미국 미시시피주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무척이나 가난했고 힘겨웠다. 부모님은 너무 가난해 함께 살지도 못했다. 윈프리의 어머니는 그녀가 어릴 때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 결국 그녀는 6살 때 할머니와 함께 살았으며 물도 나오지 않는 농장에서 생활했다. 옷을 살 돈이 없어 감자 포대를 만든 옷을 입기도 했지만 할머니는 손녀에게 아주 많은 것들을 가르쳐 주었다. 글 읽는 법부터 스스로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법 까지도 말이다. 할머니는 그녀가 자기 자신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건 윈프리에게 평생토록 결코 잊을 수 없는 가르침이 되었다.
6살 때 대도시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지만 삶은 더 힘겨웠다. 여전히 지독하게 가난했고 할머니가 너무나 그리웠던 데다가 어머니는 딸을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주 어릴 때부터 자신의 스스로 돌보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그녀는 오히려 굳게 결심할 수 있었다. 스스로를 위해 더 나은 삶을 만들어 가겠다고 말이다. 조금 더 자란 그녀는 아버지와 살았다. 윈프리의 아버지는 무척 엄격했고 교육을 최우선으로 삼고 그녀를 격려했다. 그녀는 아버지가 옳다고 생각했으며 열심히 공부해서 의도 생이 되었다. 그녀는 책 읽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점차 자신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는데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고등학생 때는 연설에서 우승을 해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윈프리에게 차즘 밝은 미래가 다가 오기 시작했다. 17살이 되던 1971년 한 미인 대회에 참가해 엄청나게 많은 관객들 앞에서 연설을 했고 상도 받았다. 한 라디오 방송국에서 윈프리의 연설에 감명을 받아 아직 10대인 윈프리에게 라디오에서 뉴스를 읽는 일자리를 주기도 했다. 윈프리는 그 일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이후 대학생이 된 후 새로운 일자리를 제안받았다. 방송국에서는 그동안 윈프리가 했던 노력을 잘 알았고 뉴스 앵커로 일해주기를 바랐다. 이제 그녀가 텔레비전에 나오게 되었다. 19세의 나이였다. 윈프리는 역사상 가장 젊은 앵커인 동시에 최초의 아프리카계 여성의 앵커가 되었다. 1976년 윈프리는 다시 뉴스 앵커 자리에 앉았지만 딱딱한 뉴스일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 마침 선배가 윈프리에게 공동 진행자로 일해 보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했다. 공동 진행자로 나선 첫날 그녀는 드디어 평생을 바칠 직업을 찾았다는 걸 깨달았다. 윈프리는 토크쇼 진행자가 되고 싶었다.
1983년에 그녀는 드디어 에이엠시카고라는 아침 프로그램을 제안을 바도 시카고로 갔다. 하지만 곧 프로그램의 인기가 형편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너무도 사랑하는 일을 하게 되어 무척이나 행복했고 프로그램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붓기로 했다. 그리고 불과 몇 달 만에 그 프로그램의 시청률은 일등으로 치솟아 올랐다. 곧 쇼의 이름은 오프라 윈프리 쇼로 변경되었고 최고의 텔레비전 쇼가 되었다.
오프라 윈프리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날마다 1000만명 이상이 그녀의 쇼를 보았다. 쇼에 인기가 얼마나 높았는지 방송사는 윈프리에게 3000만 달러 나는 엄청난 연봉을 주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믿었고 열심히 노력했고 다른 사람들과 진정으로 소통하는 법을 배웠다. 그 덕분에 역사상 가장 성공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 될 수 있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최초의 여성이면서 억만장자가 되었다.
오프라 윈프리쇼가 인기를 모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에 인기 토크쇼가 아주 많았다. 그녀는 무척 진실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손쉽게 이야기를 털어놓고 함께 웃음을 터뜨릴 수 있는 상대가 그녀였다. 사람들에게 자신이 진정으로 걱정하고 아낀다는 느낌을 안겨 주었다. 쇼의 나온 사람이 슬퍼한다면 윈프리는 거리낌 없이 함께 울었다. 미국의 유명 주간지 타임은 오프라 윈프리에게 ' 오프라는 사람들의 관심을 기울이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녀가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텔레비전 쇼로 가장 유명하기 하지만 그녀는 그 밖에도 멋진 일들을 무척 많이 했다. 북클럽을 만들기도 했는데 계획과 독서는 언제가 그녀에게 중요했다. 그래서 1996년에 그녀는 자신의 쇼에 오프라 북클럽시간을 만들기도 했다. 그녀가 소개하는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오프라 효과라는 말이 널리 쓰일 정도였다. 또한 영화에도 출연해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며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다. 그녀는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여학생들을 위한 리더십 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오프라 윈프리가 보여준 긍정적인 면들
그녀는 노력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의 삶에서 바라는 목표를 이루려면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10대 였을때 매주 새로운 단어를 20개씩 외웠다고 한다. 그 노력은 나중에 훌륭한 연설가가 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언제나 배우려는 자세를 갖고 있었다. 그녀는 배움을 사랑했다. 나이가 얼마나 많든 상관없이 더 건강해지는 법이나 더 나은 친구가 되는 법 같은 새로운 배울 것들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수많은 사람들을 도와주었다. 쇼를 통해서 다양한 사람들에게 이해받고 느끼게 되었다. 불행이 찾아온 사람들에게 돈과 각가지 물품으로 도움을 주었고 슬픔에 빠진 사람들에게 따뜻한 포옹으로 행복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녀는 언제나 밝은 면을 보았다. 삶에서 어려움을 겪었을 때도 그녀는 언제나 자신이 가진 좋은 것들에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