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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건국의 아버지이자 민족운동의 지도자 간디

나무랑께께 2022. 3. 11. 01:47

마하트마 간디

20세기 성자로 널리 알려진 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 인종 차별에 저항하는 인권 변호사로 일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로 돌아와서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비폭력 저항운동으로 많은 사람들의 호응과 공감을 이끌어냈으며 인도 독립 후 인도 분열을 막다가 암살되었다. 인도 건국의 아버지이자 인도 민족운동의 지도자 간디는 폭력이 아닌 말과 사상 실천과 자기희생으로 불의와 싸웠다. 처음으로 글을 마하트마라고 부른 사람은 유명한 시인이었다. 마하트마은 위대한 서민이라는 뜻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그를 마하트마 간디라고 부르며 존경의 뜻을 표하고 있다. 

 

폭력을 쓰지 않고 인도의 독립을 이끌었던 간디

마하트마 간디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이다. 마하트마는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으로 간디를 부르는 존칭이다. 흔히 간디는 인도의 독립을 이끈 독립운동가 또는 인종차별의 저항한 인권 변호사로 알려져 있다. 인간과 독립을 위해서 일생을 받친 사람들은 간디 말고도 많은데 왜 특별히 간디를 위대한 성세라고 추앙하는 걸까? 그것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는 사진은 바로 물레를 돌리고 있는 간디의 사진이다. 간디는 멋진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게 늘어놓으며 대중을 이끄는 일반 정치 지도자와는 달랐다. 

 

그는 영국으로 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해야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손수 옷감을 짜 입었기 때문에 물레를 돌려 실을 만들었다. 그리고 영국의 부당한 소금 세금에 항의하기 위해 직접 소금을 만들기도 했다. 

 

카스트 제도 반대한 간디 

간디는 카스트 제도에 반대했다. 인도하면 카스트 제도라는 것이 떠오른다. 카스트 제도란 인도를 통치하게 된 아리아족이 인도 땅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을 엄격하게 다르시기 위해 만든 제도이다. 이 제도는 사람들을 4개급으로 나누고 있다. 가장 높은 계급은 브라만이라는 승려이고 그 아래는 귀족 계급인 크샤트리아 그리고 그다음 아래의 평민인 바이샤, 맨 아래는 천민과 노예인 수드라가 있다. 간디는 평민 출신 측 바이샤 계급이었다. 그런데 이 4가지 계급에도 속하지 않는 천민이 있었다. 이들은 불가촉천민이라고 불렸다. 이들과 닿기만 해도 나쁜 운이 옮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들은 가장 비천한 직업에 종사하며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살아왔다. 하지만 간디는 불가촉천민 들을 즉 신의 아들이라고 부르며 함께 생활하고 카스트 제도의 철폐를 주장했다. 간디의 노력과 인식의 변화로 인도 정부는 카스트 제도를 폐지한다는 법을 통과시켰지만 아직도 인도에는 카스트 제도의 낡은 사고방식이 남아 있다.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 

간디가 살았던 시대는 우리나라 조선시대 말에서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에 이루는 시대이다. 당시 인도는 200년 가까이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간디는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 변호사 자격을 얻은 뒤 남아프리카에서 본격적인 변호사 일을 했다. 그런데 간디는 변호사 일을 하면서 단지 백인과 피부색에 다르다는 이유로 인도인들이 심한 차별을 당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 곳에 사는 인도인들은 땅을 가질 수도 없고 집을 마음대로 옮길 수도 없는데 무거운 세금을 내야만 했다. 인도인들은 선거권도 없었다. 백인들은 아시아인 등록 법이라는 법을 만들어 모든 인도인들에게 관청에 등록해 열 손가락의 지문을 찍고 신분증을 발급받도록 했다. 

 

간디는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손을 잡고 옳지 않은 법의 항의하다 수차례 감옥에 가게 되었고 집단 폭력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데 간디는 부당한 법에 대항할때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반대했다. 폭력에 대해 폭력으로 맞서면 또다시 폭력을 불러온다고 했다. 법을 따르지 않는 것만으로도 저항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간디의 이런 신념을 비폭력 저항운동이라고 한다. 간디의 비폭력 운동은 군대보다 더 강한 힘을 발휘했다. 총과 몽둥이 앞에서도 굴하지 않은 비폭력 운동에 대한 믿음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영국 언론과 세계 여론의 시선이 간디의 비폭력 운동에 쏠리고 비폭력 비협력으로 맞서는 인도인들에게 무자비하게 폭력을 휘두르는 영국 정부의 입장이 난처해졌다. 

 

1919년 우리나라에서 3.1운동이 일어나던 해 간디는 하르탈 운동을 전개했다. 하르탈은 영혼이 몹시 충격을 받아서 하루 동안 일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영국 총독부가 인도인들을 영장 없이 체포하고 재판 없이 감옥에 가둘 수 있다는 법을 만들자 간디와 모든 인도인들이 하루 동안 일을 쉬면서 단식하고 기도하자고 호소했다. 인도 전 지역에 사람들이 운동에 동참했다. 상점은 일제히 문을 닫았고 노동자들은 일을 나가지 않았고 학생들은 학교에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 운동으로 인해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계엄령이 내려진 도시에 군대가 출동해서 계엄령 해제를 요구하던 사람들에게 마구 총을 쏘게 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무려 400여 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이 소식을 들은 간디는 본격적으로 비협력 운동을 전개했다. 이제는 더 이상 협력하지 않고 비폭력으로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많은 인도인들이 이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다툼이 생겨도 영국 법원으로 가지 않고 인도 사람들끼리 해결했고 학생들은 총독부에서 세운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공무원들은 사표를 냈고 선거가 있어도 참여하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인도의 독립후 간디 암살 

2차 세계대전 이후 드디어 인도인들과 간디의 오랜 소망이 이루어졌다. 인도가 영국으로 독립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인도는 두 나라로 나뉘고 말았다. 오랫동안 힌두교와 갈등을 겪어 오던 인도네 이슬람교 신자들이 분리독립을 요구하여 파키스탄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인도 전 지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따라 대 이동을 했다. 그런데 이렇게 갈라진 다음에도 두 종교 간의 싸움은 계속되었다. 그러자 간디는 인도의 평화를 위해 기도를 하며 단식을 했다. 그런 간디의 행동에 불만을 품은 세력이 있었는데 바로 힌두교였다. 간디가 이슬람 세력을 지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힌두교가 결국 간디를 암살했다. 1948년 1월 31일이었다. 

소심하고 수줍음이 많은 아이 간디

간디는 소심한 아이였다. 영국에서 변호사 자격을 얻어 고향에 돌아와 첫 소송을 맡아 재판이 있었을때 간디는 너무 부끄러운 데다가 긴장한 나머지 한마디 말도 못 하고 자리에 앉고 말았다. 세계인의 정신적 지도자로 존경받게 된 간디도 한때는 소심하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었다는 점은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는 이야기이다. 

 

간디의 삶에서 가장 큰 전환점은 기차 칸에서 백인에게 쫓겨난 사건인것 같다. 깜깜한 대합실에서 간디는 내 권리를 찾을 것인가 아니면 그냥 인도로 돌아갈 것인가 고민하다가 무슨 일이든지 맞서 싸우겠다고 결심했다. 걱정에서 용기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는 부분이다. 

인도와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은 무엇이 다를까 

우리나라에서도 1919년 3월 1일에 맨손으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운동이 벌어졌다. 전국적으로 일어난 3.1 운동은 비록 일본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지만 우리 민족 저항 정신을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역사가들은 3.1 운동이 중국을 비롯해 인도에 까지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다. 우리나라의 김구 선생님도 간디처럼 평생 독립과 통일을 위해 살다가 암살당한 점에서 간디의 삶과 비슷하지만 무장 독립 투쟁을 했다는 점에서는 간디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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